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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사자는 트럭에 싣고 산사람은 걸어서 후퇴”
  |  입력 : 2017-07-03 1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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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대통령 방미시 첫 번째 방문지로 장진호 전투 기념비 찾은 이유는?
1950년 개마고원 장진호 전투의 미 해병1사단 뒷이야기


[보안뉴스 성기노 기자] 미국 방문에 나선 문재인 대통령은 현지에 도착하자마자 곧바로 장진호전투 기념비가 있는 버지니아주 콴티코의 미 국립 해병대 박물관을 찾았다. 미국과 개인적인 유대관계가 별로 없는 문 대통령은 그의 첫 번째 ‘방문지’를 미국과의 혈맹 우의를 상징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장진호 전투 기념비를 택해 미국에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문 대통령의 부친 또한 장진호 전투 뒤의 흥남철수작전으로 한국으로 피난 왔고, 오늘날의 문재인 대통령이 있게 한 전투이기도 하다.

[이미지=iclickart]

장진호 전투는 유엔군이 북한군의 기습공격을 극복하고 북진을 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일종의 ‘사고’였다. 장진호 전투의 주역 미국 제 1해병사단은 2차 세계대전으로 그 명성을 떨친 유명한 부대였다. 그들은 과달카날과 유황도에서 극악하게 저항하는 일본군들을 격멸하고 섬들을 점령하는 전공을 세운 미군의 최정예 보병사단이었다. 그들은 6·25전쟁 개전 한 달 만에 한국으로 파병되어 낙동강 전선의 위기시 중요한 역할을 했다. 9월에는 인천 상륙작전과 서울 탈환의 영웅적 주인공이 된다. 이 사단은 서울 탈환 후 다시 동해안으로 이동하여 흥남을 거쳐 문제의 그 장진호로 향하게 된다.

해병1사단은 유엔군의 북진에 맞추어 서부전선부대와 접촉을 유지하라는 명령을 받고 장진호 방면 진출을 위해 원산에 상륙했다. 처음에 동부에 있었던 미국 10군단과 미국 1해병사단은 장진호 쪽으로 어렵게 북상하게 된다. 미국 1 해병사단은 북한군의 정부가 도피중인 강계를 점령하기 위해 장진호 쪽으로 북진하게 된다. 하지만, 미국 10군단은 11월에 중공군의 습격, 강추위로 인해 철수했다.

미 1해병사단은 함경남도 개마고원의 장진호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임시 수도인 강계를 점령하려고 접근했다. 하지만 장진호 근처의 산 속 곳곳에 숨어있는 중국인민지원군(중공군) 제9병단(7개 사단 병력, 12만 명 규모)에 그만 포위되어 전멸 위기를 맞게 된다.

바로 이 과정에서 궤멸직전의 병력을 무사히 빼내 후퇴한 작전이 바로 장진호 전투인 것이다. 후퇴라는 것은 군사적 패퇴를 의미하지만 전멸까지 가지 않은 것만으로도 ‘성공한 작전’이었다고 할 만큼 장진호 전투는 미군의 전사에 “역사상 가장 고전했던 전투”로 기록되어 있다.

장진호 후퇴 당시 1 해병사단 외에 미국 육군 7사단 병력 일부도 함께 했다. 이 후퇴작전을 통해서 미 해병1사단은 자신의 10배에 달하는 12만의 중공군 남하를 지연시켰으며, 중공군 12만 명의 포위를 뚫고 흥남에 도착, 흥남 철수를 통해 남쪽으로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 흥남 철수는 193척의 군함으로 군인 10만 명, 민간인 10만 명을 남쪽으로 탈출시킨 사건을 말한다. 흥남 철수의 작전시작한 날은 바로 대한민국이 평양에서 철수한 날이었다. 또한 흥남 철수 작전이 바로 1.4 후퇴의 시작이었다. 바로 이 과정에서 문재인 대통령의 부모와 누나도 7600t급 상선 메러디스 빅토리호를 타고 흥남을 탈출해 거제에 정착했다. 문 대통령은 3년 뒤인 1953년 1월 거제도에서 태어나게 된다.

장진호 전투는 여러 측면에서 전선에 영향을 주었다. 중공군은 장진호 부근 전투에서 전투손실 뿐 아니라 비전투손실도 상당히 입게 되었다. 이에 따라 더 이상의 군사작전 수행이 불가능해 중공군 제9병단 지휘부는 3개월에 걸쳐 부대를 재편성하기 위해 후방으로 철수했다. 반면에 미 제1해병사단은 중공군의 강력한 포위망을 돌파하여 함흥지역으로 철수하는데 성공했다. 뿐만 아니라 중공군 제9병단이 서부전선의 제13병단을 증원할 수 있는 역량을 소멸시킴으로써 서부지역 전선의 미 제8군이 위기를 모면하는데 일조하였다.

전쟁의 승전보가 주로 특정지역이나 수도를 점령했을 때 그 전과를 치하하는데 장진호 전투는 ‘성공적인 후퇴’라는 다시 기묘한 이름으로 불리게 된다. 당시 살을 에는 추위와 현격한 전력을 차이를 극복하고 이뤄낸 작전이었기에 ‘성공한 후퇴’로 기억하게 된다. 전멸할 위기에서 그나마 소수의 병력이라도 무사히 빠져나오게 되고 또 그것이 중공군에 막대한 피해를 입히는 등 전체적으로 보면 이익이 되었던 전투였다. 하지만 1950년도 사건 당시, 미국의 뉴스위크지는 “진주만 피습 이후 미군 역사상 최악의 패전”이라고 혹평하는 등 논란이 상당히 많았던 전투이기도 하다.

장진호 전투로 미 해병 사상자는 3637명, 비전투 사상자는 3657명, 중공군 전사자 2만5000명에 달했고 부상자도 1만2500명이나 됐다. 영하 32도까지 떨어지는 개마고원에서 동상으로 인해 사망한 병사들이 많았고 일개 중대가 전부 얼어 죽는 비극이 발생하기도 했다. 당시 10군단장 아몬드는 엄청난 병력의 해병들이 사지에 내몰린 것을 뒤늦게 알고 모든 장비를 버리고 신속히 해안으로 탈출하라고 지시했었다. 하지만 사단장 스미스 장군은 그 명령을 거부하고 중공군의 거센 공세를 맞받아치면서 모든 장비는 물론 전사자의 사체까지 모두 운구해 가지고 철수했다. ‘전장에 전우를 두고 오지 않는다’는 미 해병의 전통에 따라 시체는 트럭에 싣고 산 사람들은 걸어서 후퇴를 했던 장진호 전투의 해병대는 오늘날에도 세계 최강의 군대로 남아 있다.
[성기노 기자(kino@boan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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