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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죽은 자와 경쟁한다는 건 죽은 자의 몫

  |  입력 : 2021-04-25 1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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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레베카>에 대한 약한 ‘스포일러’가 담겨 있습니다만, 어차피 그 영화 안 보실 걸 알아요.

[보안뉴스 문가용 기자] 위인전은 나오지만 위인은 나오지 않는 때다. 그 어떤 위대한 성취도 무덤 속 인물들과의 비교로 평가절하 당하는 게 일종의 문화로 정착한 지 오래이기 때문이다. 묘비를 아는 것이 지식의 척도라 우리는 오래 전 죽은 자들의 무덤을 백골이 진토 되도록 파고 또 판다. 새로운 시도는 이 영원한 장례식과 같은 문화 속에서 금세 섣부르고 설익은 것이 되어버린다.

[이미지 = 네이버 영화]


기억 뒤편으로 흘려버린 시간과 사람들이 너무 많이 쌓인 걸까. 마치 남은 시간이 얼마 되지 않는 것처럼, 우리는 죽은 자들과 경쟁하며 사는 것에 익숙하다. 하지만 이미 그들을 성역화 했기 때문에 경쟁이 되지도 않는다. 우리가 만든 것들과 이룬 것들은 수십 년에서 수백 년 앞선 누군가의 것보다 늘 모자라고 부족해야만 하다. 아주 특별한 소수의 경우를 제외하면 말이다.

큰 화제를 끌지 못하고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진 영화 <레베카>는(이 경우, 과거 명작들과의 비교 때문에 억울하게 잊힌 건 아니다) 살아 있을 수 있는 시간을 죽은 자의 뒤를 좇는 데 보내는 것만큼 숨 막히게 하는 것도 없다는 걸 생생하게 보여준다.

거대한 저택을 소유했지만 최근 아내를 잃은 멋진 귀족 남성과 결혼한 주인공은, 어딜 가나 사망한 전 부인과의 비교에 시달린다. 치매에 걸린 시할머님조차 레베카를 데려오라고 하고, 시중을 드는 하인들조차 그녀가 얼마나 예뻤으며 취향도 고상했는지 강조한다. 죽은 자의 옷을 살아 있는 부인에게 입히며 전 주인이 얼마나 옷발이 좋았는지를 회상하는가 하면, 레베카만큼 남편의 사랑을 받을 수 없을 거라고 면전에 대고 예언하기도 한다.

남자 하나 믿고 시집 왔는데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레베카’ 노래를 부르니 주인공은 노이로제가 걸릴 지경이다. 그래서 전 부인의 행적을 복제하기 시작한다. 무도회를 기획하고, 드레스를 고르고, 저녁 만찬을 감독한다. 귀족의 취향을 배우려고 새로운 속옷을 주문하고, 무도회 복장들을 그림까지 그려가며 학습한다. 전 부인에게 충성스러웠던, 그러므로 자신에게 적대적이었던 집사에게 접근하여 도움을 요청해 관계를 트기도 한다.

‘와, 이거 보안 생태계를 풍자한 스릴러 혹은 블랙코미디인가?’라는 생각이 들어 영화 장르를 다시 한 번 확인했다. 보안 전문가들을 괴롭히는 ‘레베카’는 누구인가? 지하(다크웹)에서 둥지를 트고서도 양지에서 영향력을 발휘하는 악몽 같은 존재, 사이버 범죄자들이다. 레빌, 갠드크랩, 라자루스 등 얼굴은 없는데 이름만 남기는 자들 말이다. 마침 <레베카>에서도 주인공과 시청자들은 단 한 번도 그 아름답다던 레베카의 얼굴은 보지 못한다.

보안 담당자들의 주변 세상은 사이버 범죄자들을 계속해서 노래한다. 문화와 언론에 등장하는 그들은 천재이고, 늘 창의적이며, 부지런히 계발에 힘쓰고, 늘 한 차원 높은 곳에서 현존하는 모든 IT 기술을 내려다보고 있다. 따라서 언제나 이기며, 지는 방법을 모른다. 심지어 후드에 한해서는 옷발도 잘 받는 것처럼 보인다. 때로는 자유와 혁명의 상징으로 비쳐지기도 한다.

주변이 이러니 의식하지 않으려야 않을 수가 없다. 보안 담당자들도 창의적이어야 하고, 늘 계발에 힘써야 하며, 모든 난관을 한 차원 높은 곳에서 척척 천재적으로 해결해야만 할 것 같다. 창의력과 문제 해결력이 요구되는 것 자체는 맞다. 하지만 보안 담당자들은 그러한 면에서 이미 충분히 출중하다. 다만 그 비교 대상이 얼굴도 보이지 않는 미지의 집단이기 때문에 늘 지는 느낌이 드는 게 문제다. 늘 그렇지만 그 ‘느낌’에 함정이 존재한다.

함정에 빠진 보안 전문가들은 <레베카>의 주인공처럼 자신의 모습을 잃어간다. 취약점을 발견하거나 새로운 해킹 기법을 연구했을 때 안전한 장치가 마련될 때까지 응당 기다려야 하는데 일단 발표부터 하고 본다. 심지어 실력도 좋아 실험용 익스플로잇까지 마련한다. 그러면서 새로운 해킹의 유행을 선도한다. 이번 달 열렸던 폰투온 해킹 대회에서 발굴된 제로데이 취약점이 행사 끝난 직후 트위터에 등장하기도 했고, 제로데이 취약점을 돈 많이 주는 곳에 팔아야 하니 원 개발사가 패치할 기회가 무시되기도 한다. 보안과 크래킹의 경계가 이런 순간들에 흐려진다.

역설적이게도 <레베카>의 주인공은 남편이 살인죄를 쓰고 사형에 당할 처지가 되자 살아나기 시작한다. 전 부인의 굴레를 벗고 본인의 생각과 의지로 살아있는 아내의 역할을 하기 시작한다. 남편의 구명을 위해 뛰는 동안 레베카라는 이름은 그녀를 괴롭힐 수 없게 된다. 사실 처음부터 그랬는데, 살아있는 사람을 위해 살기 시작하고 나서야 죽은 자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된 것이다.

보안도 살아있는 것을 위해 기능을 발휘해야 한다. 사랑하는 가족과 친구들을 위해 보안을 쉽게 해설하는 이들, 안전 지킴이에서 사업 활성자인 비즈니스 인에이블러(business enabler)로서의 역할을 받아들이려 새로운 공부를 시작한 이들, 조직의 방대한 네트워크를 하루라도 빨리 머릿속에 집어넣기 위해 날마다 일과 시간이 끝난 줄도 모르고 네트워크 시스템을 한 대 한 대 점검하는 이들은, 매체나 대중들의 입에 오르내리지 않더라도 실제 현장이나 인터뷰 자리에서 만나면 빛이 난다. 살아 있는 것을 좇고 있으며, 그러므로 살아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 누구도 사이버 범죄를 동경해 보안 전문가가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들의 범죄 소식에 혀 차지 않을 보안 전문가도 없다. 그럼에도 누구에게나 사이버 범죄자의 뒤를 좇게 할 씨앗이 존재한다. 그 씨앗의 이름은 원동력이다. 사이버 범죄자를 움직이게 하는 건 ‘돈’과 ‘자기과시’라고 한다. 보안 전문가들도(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전문성에 대해 높은 대가를 원하고, 어느 정도 유명해지거나 동료들로부터 인정을 받고 싶어 한다.

하지만 비슷한 기술을 가지고도 보안 전문가들과 달리 그들의 서식지가 어둠의 땅이 될 수밖에 없는 건, 돈과 과시(인정)라는 두 가지 원동력이 전부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비슷한 기술을 가지고 살아 있는 것들을 위해 움직이려면 이 두 가지에 더해 다른 원동력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것이 <레베카>의 주인공에게는 남편의 생명이었다. 우리에게는 연봉과 인정 외에 그 뭔가가 있는가?

살아있는 것을 위해 기능을 발휘한다는 건, 돈과 과시라는 1차원적 본능 외에 다른 뭔가를 찾았다는 것이다. 그 기회가 이 영화의 주인공처럼 의도치 않게 위기라는 옷을 입고 갑자기 들이닥칠지도 모른다. 각종 보안 사고와, 책임을 오롯이 떠안고 해고될지도 모른다는 불안은, 오히려 보안 전문가들이 생명을 추구하도록 안내하는 이정표일지도 모른다. 그야말로 기회를 위기로 삼기에 안성맞춤인 곳이다. 양지에만 있는 공식이다. 누려봄직도 하다.
[국제부 문가용 기자(globoan@boan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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