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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연휴에 드라마 보고 책 봤어요...라고 막 이래

  |  입력 : 2021-01-09 0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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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소문이 하도 좋아서, 책 제목이 너무 강렬해서 봤더니...

[보안뉴스 문가용 기자] ‘암, 아무리 천재라도 게임 공략집은 무시할 수 없지.’ 넷플릭스에서 한 동안 유행했다던 드라마 ‘퀸스 갬빗(Queens Gambit)’을 연휴 기간 동안 완주하면서 얻은 교훈이다. 덕분에 과거의 나쁜 기억들이 한꺼번에 치유됐다. 체스에 관한 기억이다.

[이미지 = utoimage]


고등학교 졸업반이 되던 해, 본격적으로 공부를 시작해야 했고, 그래서 고2까지 해왔던 운동들을 전부 그만두었다. 대신 머리가 좋아질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안고 체스부에 가입했다. 초보라고 설명을 했지만 수학과 체스류에 강하기로 소문난 아시아인이었고(학교는 외국에 있었다), 고3이라 나이도 많은 축에 속했기 때문에 후배들이 만장일치로 기자를 주장으로 뽑았다.

하지만 아무리 아시아인의 피를 가졌다 해도 초보는 초보. 매주 시합에 나갈 때마다 가장 빠른 시간에 패하기 일쑤였고, 어느 덧 시즌 막바지에는 후배들의 기대감이 ‘학교 역사에 전무후무한 한 시즌 전패 주장’의 기록을 세우느냐 마느냐로 바뀌어 있었다. 다행히 시즌 마지막 시합에 요행수로 이겨서 전패의 수치는 면할 수 있었다(재미있게도 기자의 1승 제물은, 그 지역 그 시즌에 단 한 판도 안 진 녀석이었다). 그렇게 인종 편견은 깨지고, IQ는 1도 변함이 없더라.

드라마 ‘퀸스 갬빗’에 대한 소개에는 ‘체스 천재 소녀 이야기’라는 표현이 나와 있다. 시나리오가 머릿속에 자동으로 그려졌다. 눈감고도 어른을 이기는 여자 아이가 신드롬을 일으키며 등장해 승승장구 하다가 점점 피폐해져 가고, 극적으로 재기에 성공하고 부활하는 감동 성공 드라마이자 미국 감성 가득한 신파 정도?

예상은 빗나갔다. 주인공은 천재이긴 했는데 좀 다른 유형이었다. 천재이긴 했는데 어딜 가든 체스 기보와 해설서가 손에 들려 있었고, 밤이면 천장에 환각으로 나타난 체스판으로 대국을 하기 위해 금지된 약의 도움을 받을 정도로 체스란 것에 미쳐 있었다. 그 드라마 내내 주변 사람들과의 대화에 제대로 반응도 못할 정도로 체스 공략집에 얼굴을 파묻고 있는 장면이 나온다. 어떤 대회에 나가든 ‘난 이길 것’이라고 장담할 때의 말투도 그냥 자신감이 아니다. 자신이 투자한 것만큼의 근거가 존재하는 확신이었다.

근거 있는 자신감은 전염력이 강한가 보다. 체스라는 것에 수십 년을 주눅 들어 살아온 기자는 아이들과 놀아준다는 핑계로 마트로 가 체스 세트를 구입하고 여러 공략집도 다운로드 받아 읽으며 아이들에게 가르쳐주기 시작했다. 아이들 사이에 소문난 고수들을 찾아다니며 도장깨기를 한다는 과감한 계획도 품고 있다. 이미 동네에서 꽤나 랭킹이 높았던 우리 아들 친구를 이기는 성과도 있었다. 10살짜리긴 하지만 어찌됐든 인생 2승째다.

체스 공략집을 보기 전, 기자는 기수(말)를 움직일 줄만 알면 그 다음부터는 체스판에서의 번뜩이는 감각과 수 읽기 - 즉, 창의력과 지능 - 만으로 승패가 결정 나는 줄로 알았다. 아니었다. 기수의 움직임을 익혔다면, 이제 그런 기수들을 조합해 전개하는 순서, 즉 전략을 학습하는 단계를 거쳐야 했다. 창의력이나 천재성이라고는 전혀 없을 것 같은 정형화된 전략들을 충분히 깔아두어야, 그 위에 지능이건 창의력이건 발휘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드라마 속 천재 소녀가 공부하던 것도 바로 이 전략들이었다.

신기하게도 같은 연휴 기간 동안 읽었던 책, ‘3개월 만에 유창하게(Fluent in Three Months)’의 내용이 기억났다. 어떤 언어든 3개월만 공부하면 된다는, 대단히 자극적인 제목을 가진 책이라 골랐는데, 크게 획기적인 언어 학습법이 소개된 건 아니라 속았다는 생각만 하며 대강 훑기만 했었다.

다만 “처음 외국어를 익힌다고 그 언어로 된 영화나 TV 쇼를 주구장창 보거나, 아예 잠시 이민이나 유학을 가서 외국인들과 현지어로 생활하는 건 나중 단계에서 할 일”이라는 저자의 지적은 잊지 않고 있었다. 그는 “처음에는 그 언어의 단어와 문장을 충실히 외우는 것부터 해야 하고, 어느 정도 기본을 익히고 난 후에 언어 실력을 고급화 하는 단계에서 영화나 라디오, 유학의 힘을 빌려야 효과가 있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분야가 무엇이든 중간 단계로 가는 가이드라인을 찾지 못하는 것이 초보들이 겪을 수 있는 가장 큰 불행이다. 그 불행은 꽤나 잦게 찾아온다. 그러니 새해 결심의 수명이라는 것이 얼마나 짧은지 2월이면 온 세계가 가장 슬픈 음악을 듣는다는 통계 결과가 있는 것 아니겠는가. 그 이유는 뭔가를 시작하는 계기가 되는 것들이 대부분 그 분야의 최상위층에게 허락된 가장 아름답고 멋진 상태의 것들이기 때문이다. ‘몸짱’이 되어 온갖 부러움의 시선을 받고, 자막 없이 영화와 뉴스를 이해하며, 체스판 위에서 현란한 지능 대결을 펼치는 꿈 모두 전부 제대로 된 중간 단계를 거치지 못하면 2월의 슬픈 음악들로 귀결될 가능성이 크다.

멋져 ‘보이고’, 있어 ‘보이는’ 것들 위에 세워진 각오란 사상누각이다. 그런 것들을 제시하면서 꿈을 크게 가지라고 말하려면, 그 중간의 과정들도 소개할 수 있어야 한다. 해외의 보안 업계는 인재난에 시달리다 못해 높은 연봉과 백만장자가 된 프리랜서 취약점 발굴자들인 버그헌터들을 강조하고 있다. 이 업계만 들어오면 고수익이 보장된 것처럼 논조가 구성된 기사나 칼럼들이 이따금씩 보인다. 그런 글들을 보고 수많은 사람이 지원한다 하더라도, 얼마 가지 못한다. 실제로 인재난은 아직도 해결의 기미조차 보이지 않고 있다.

높은 연봉을 강조하고(한국은 그도 아니지만..) 돈 잘 버는 버그헌터들을 소개하는 게 잘못되었다는 건 아니다. 그런 것들에 혹해 이 분야에 들어오려고 간을 보는 사람들에게 제시할 중간 단계에 대한 고민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체스? 그거 쉬워. 기물들만 규칙에 따라 움직이면서 상대 왕을 먹으면 돼. 머리만 잘 쓰면 엄청난 상금도 받아.’ 우리는 여기까지만 말해주고 있는 건 아닐까. 그 머리를 잘 쓰기 위한 초석인 기보 학습에 대해서는 침묵하면서 말이다.

비전공자 입장에서 보안은 진입 장벽이 높아도 너무 높은 분야다. 온 세상은 점점 더 보안을 강조하고 있지, 테크 유튜버들조차 신제품이나 기술을 소개할 때 보안을 언급하는 경우가 늘고 있지, 전망이 좋아 보이고 현대인의 필수 지식 같긴 한데 뭘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는가? ‘해킹 노하우’와 같은 서적들을 보고 독학해야 할까? 보안으로 오는 길의 초입에 약속만 무성해 가시성이 훼손된 건 아닌지 돌아봐야 한다.

언젠가 유능한 후배가 될지 모르는 새싹이 1주일 전쯤 새해에 보안 전문 지식을 쌓기로 결심했을지도 모른다. 그가 2월에 슬픈 음악을 듣지 않도록 ‘보안 기보’를 좀 만들어 둘 때다. 보안을 잘 알고 사랑하지만, 같이 일할 사람들이 없어 허덕이는 지금의 선배들이 말이다.
[문가용 기자(globoan@boan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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